본문 바로가기


소설 번역/하가쿠레 사쿠라는 한탄하지 않는다

하가쿠레 사쿠라는 한탄하지 않는다 -5장 127. 두 송이의 꽃

by 린멜 2020. 12. 22.


127. 두 송이의 꽃







씁쓸하게 웃는 히츠기의 재촉을 받아 갑판으로 올라간 츠구미는, 물을 받아 끈적거리는 소금물을 씻어 내리고, 빌린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히츠기는 조종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선내로 돌아갔고, 현재 갑판에 있는 것은 츠구미 한 명뿐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바다 위에 펼쳐져 있다.

……저걸로 속아줬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추궁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뭐, 소문이 난다 해도 하가쿠레 사쿠라의 불가사의한 에피소드(본의 아님)이 늘어날 정도일 뿐이겠지.

그리고 츠구미가 엉킨 머리칼을 빗으로 쓸고 있는데, 배 위에서 히츠기의 옆에 있던 소녀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 소녀의 얼굴을 보고, 츠구미는 놀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분명, 유메지 양 이었죠?"


츠구미가 그렇게 말하자, 소녀――유메지 나데시코는 네, 하고 반가운 듯이 웃었다.


……멀리서 봤을 때 비슷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유메지 본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히츠기와 유메지의 접점을 만든 건 어찌 보면 츠구미의 짓이니, 이렇게 둘이 함께 있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 둘이 함께 있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대체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때 몰래 건네준 연락처에 답장이 없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이 모습을 보니 히츠기 씨가 움직여 준 모양이군요."


츠구미가 여느 때보다 의식해 연기를 하며 그렇게 대답하자, 유메지는 파티에서 봤던 음울한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반가워하며 입을 열었다.


"하가쿠레 씨가 언니의 편지를 전해 준 덕분에, 히츠기 씨가 제 부모님을 설득해 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깊이 고개를 숙이는 유메지를 바라보며, 츠구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 골목길에서 만났을 땐 정말 형편없는 아이라 생각했지만, 환경이나 마음가짐에 따라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감회가 새로워졌다.


"아뇨, 전 별로 한 게 없어요. 당신이 현상을 바꾸려 노력했기에 지금의 결과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잘 됐네요"


상냥하게 그렇게 말하고, 츠구미는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지금 모습이 흠뻑 젖은 수영복 차림만 아니었다면 그림이 되었을 테지만, 그걸 말해도 소용없다.

츠구미의 대답을 듣고 유메지는 안심한 듯 웃더니, 조금씩 자신의 근황을 말하기 시작했다. 부모와의 관계성이 다소 개선된 것. 이따금 히츠기가 상황을 보러 오게 된 것. 소중한 친구가 마법소녀를 목표로 노력하고 있단 것. 대개는 나나세 츠구미로서 만났을 때 들어본 적 있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하가쿠레 사쿠라와 나나세 츠구미는,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는 생판 남이다. 관계성을 깨달을 법할 행동을 해선 안된다. 왠지 속이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모르는 게 좋은 것도 있다. 유메지 역시, 존경하는 언니가 아는 오빠였단 사실을 알고 싶진 않겠지.


"이 배에는 저 말고도 제 친구가 타고 있는데, 그 아이는 마법소녀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상태가 좋으면 하가쿠레 씨에게도 소개하고 싶지만, 그 아이는 뱃멀미를 하는 바람에…… 지금은 배 안에 누워있어요."

"그런가요…… 빨라 좋아졌으면 좋겠네요."

"네. 그래서 곧 육지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바람에 날린 그 아이의 모자를 회수하려다 하가쿠레 씨를 발견한 거예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아, 육지로 돌아가면 그 아이를 소개해 줄게요. 정말 좋은 아이예요!"


……십중팔구 그 친구라는 건 이타도리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복잡한 심경이기도 하다. 츠구미로서는 이 모습일 땐 나나세 츠구미의 지인과 만나는 건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다. 아마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래도 불안하기는 하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히츠기가 안에서 돌아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나데시코 짱은, 감사인사 제대로 했어?"

"네. 외에도 잔뜩 이야기했어요!"

"후후, 잘 됐네. ――저흰 이제 육지로 돌아갈 생각인데, 하가쿠레 씨는 이 뒤에 뭔가 예정 있으신가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차라도 마시겠어요? 이 아이도 아직 대화를 더 나누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그렇게 물어오는 히츠기에게, 츠구미는 역시 이런 흐름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며 승낙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로 좋다면 기꺼이."


……실은 예정이 있다 대답해도 됐지만, 바다에서 떠돌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용무가 있다」고 해도 거절할 구실 정도로만 생각할 것이다. 츠구미는 무리하게 거절해서,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유메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순 없었다.




◆◆◆




바다에서 육지로 돌아온 츠구미들은, 유메지의 집이 가지고 있는 바다에 인접한 별장의 테라스에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배가 육지에 도착했을 때 처음에 보인 건물은 역시 오랜 가문의 별장이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해서,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녀도 되는 걸까 하고 불안해졌지만, 들어온 곳이 별택의 테라스임에 안심했다.

테라스 근처에는 이따금 파도가 밀려와 백사장을 적시고 간다. 츠구미의 앞에는, 츠구미의 모습이 신경 쓰였는지, 수영복을 맞춰 입고 온 히츠기와 소녀 두 명――뱃멀미에서 회복한 이타도리와 유메지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 그, 저는 이타도리 카나에라고 합니다……"


망설이다 입을 연 이타도리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불안한 듯 유메지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타도리의 입장에선, 배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십화의 마법소녀와 대면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당황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안녕하세요, 이타도리 양.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네, 물론이죠. 하가쿠레 씨는 유명하니까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후후, 고마워요. 유메지 양에게 들었습니다만, 이타도리 양은 마법소녀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서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세요. 뭐, 전 재야 마법소녀라 별로 참고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츠구미가 상냥하게 그렇게 말하자, 이타도리는 더듬거리며 질문을 시작했다.


"저기, 재야는, 신 님이 직접 스카우트 한 사람인 거죠? 정부 마법소녀와는 뭐가 다른가요?"

"음― 주로 대우일까요. 재야는 정부의 구속이 없는 만큼 자유도가 높지만, 정부 시설을 사용하지 못한다거나, 포상금액이 줄어들어요. 학업성취로 따지만, 아르바이트생 취급이니까 마수와의 전투로 학교를 빠져도 공휴로 취급이 안 되곤 하죠."

"그, 그런가요…… 왠지, 큰일이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서민적인 대답에 놀랐는지, 이타도리는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마법소녀라 해도, 재야와 정부 소속의 입장은 다르다. 그 점은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조직에 속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뒷받침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특별히 이유가 없다면 정부 소속이 되는 게 가장 좋아요. 전 신의 뜻 때문에 그럴 수 없지만…… 그렇네요, 다른 차이라면 신과의 관계성 정도일까요."


그렇게 말하며 츠구미가 난처한 듯 웃자, 말없이 이타도리들을 바라보던 히츠기가 이상하단 듯 입을 열었다.


"신과의 관계성? 뭔가 다른 게 있는 건가요?"

"있어요. 정부 마법소녀는, 후보생 중에서 신이 계약자를 고르는 스타일이지만, 신이 계약자의 행동에 이래저래 집요하게 참견하진 않잖아요? 은퇴할 때도 마법소녀의 의지가 최우선이고. ――하지만 재야 마법소녀는, 신이 압도적으로 위예요.


――재야 마법소녀의 몇 할은,  마수 결계 사고에 연루된 피해자라고 벨이 예전에 말했다.

목숨을 구해주는 대신, 그 몸을 신에게 바친다.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 존재했던 인간과 신의 계약이며, 쉽사리 깨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재야 마법소녀는 신의 터무니없는 강요에 의해 고랭크의 전투를 강요당하고, 목숨을 잃는 일도 적지 않다.

츠구미가 계약을 맺은 신도 처음에는 그런 류의 외도적인 기색이 어른거렸지만, 지금은 최고의 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아무런 문제도 없다.


"재야 마법소녀의 상당수는 어떤 소원의 대가로 신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야 마법소녀는 신의 허락이 없는 이상, 마법소녀를 그만둘 수 없어요. 손을 잘못 잡은 아이는, 그야말로 비참하다 할 수 있죠."

"그런 일이…… 몰랐어요."


충격을 받은 듯 입가를 누르는 히츠기에게, 츠구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부에 있는 재야 마법소녀는, 기본적으로 신과의 관계가 좋으니까요. 처음부터 정부에 소속되어 있던 히츠기 씨가 모르는 건 당연해요. 게다가, 히츠기 씨의 신은 상냥한 분이니까. 불쾌한 내용을 히츠기 씨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했을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분은, 저를 친자식처럼 귀여워해 주셨으니까……"


아련히 눈꼬리에 눈물이 글썽이는 히츠기를 바라보며, 츠구미는 히츠기의 계약 신――거대거미의 모습을 한 귀자모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맡에 서있을 땐 솔직히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무서웠지만, 히츠기에게 있어선 좋은 신이었을 것이다.


"그럼, 재야의 스카우트는 받지 않는 게 좋은 건가요?"


겁에 질려 새파래진 얼굴로 그렇게 묻는 유미지에게, 츠구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재야의 신들 모두가 나쁜 건 아니에요. 그중엔 인간 사회를 잘 몰라 한도를 몰랐다는 케이스도 있고, 그야말로 신에게 달려 있는 거죠. ――적어도 전 지금 신을 만나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분명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벨을 떠올린다. 지난 1년, 힘든 일도 많았지만,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벨이 옆에 있어줬기 때문이다.

그렇게 잔잔하게 미소 짓는 츠구미를 보며, 이타도리는 중얼거리듯 툭하고 내뱉었다.


"――저도 노력하면, 하가쿠레 씨의 신 님처럼 멋진 신 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착한 신은 언제나 노력하는 사람을 지켜봐 주시니까요."


그러길 바라며 말을 잇는다.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신이, 이 아이의 좋은 점을 봐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바라고 있다.

그 후로 잠깐 동안, 마수와의 전투 소감이나 히츠기가 말해주는 후보생의 실태 등을 경청한 뒤, 대화하다 지친 소녀들은 히츠기에게 모처럼 수영복으로 갈아입었으니까라 말하고 기분전환으로 바다로 달려갔다.


"――고마워요, 하가쿠레 양."

"아뇨, 저도 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즐거웠으니까요. 저런 순진한 아이가 후배라 생각하니, 앞으로가 기대되네요."


츠구미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자, 히츠기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에요. 불안해할까 봐 그 아이들의 앞에선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저, 그때 제대로 감사인사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구해줘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귀찮게 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히츠기는 츠구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히츠기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게다가, 감사인사를 해야 할 건 오히려 저인걸요."

"에?"

"――살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전,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히츠기를 버리는 선택을 했더라면 츠구미는 분명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히츠기가 웃으며 살아간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오히려 폐를 하나 뭉개는 바람에 마법소녀의 미래를 앗아간 빚이 더 크다.


잡힌 손을 되잡으며, 츠구미는 천천히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히츠기는, 눈부신 것을 본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난처한 듯 웃었다.


"당신이 여성이라 다행이에요. 남자였다면 분명 좋아했을 테니까."

"그, 그거 영광이네요?"


츠구미가 어른 여성의 미소에 흔들리며 그렇게 답하자, 히츠기는 장난이 성공한 아이처럼 웃었다.


"후후, 농담이에요. ――그러고 보니, 요즘 휴우가 양은 어떤가요? 하가쿠레 씨와 친하게 지낸다던데."

"휴우가 양이요? 여전히 바쁜 것 같아서 정부에선 별로 만나지 못했네요. 아아, 하지만 다음에 같이 다른 지부의 시찰을 가기로 약속을――"


――그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발밑에서 대량의 애벌레가 기어오르는 것 같은, 비정상적일 정도의 불쾌감. 그 기묘한 감각에 주위를 둘러보는 찰나, 그것을 발견했다.


테라스 옆으로 피어나는, 두 송이의 붉은 꽃. 철 지난 튤립 같은 그 꽃은, 살아있는 것 마냥 고개를 들고 그 공동을 츠구미와 히츠기에게 향했다.


펑, 하고 총성 같은 파열음이 주변에 울린다.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와, 흐르는 피. ――11년 너머의 저주가, 지금 꽃피었다.

반응형

댓글